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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반다방

황흥구 회원 에세이 - 임주연의 신바람 라디오 90.7FM


화려한 외출

 

         황 흥 구 

                                                                     

 작년 이맘때 내년에는 결혼30년 주년 기념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오자고 아내와 약속하였다. 그러나 맞벌이 하는 딸이 손녀를 맡기는 바람에 또 남한테 애를 맡긴다는 것이 쉽지 않아 이리저리 생각 끝에 손녀를 데리고 장인어른도 모시고 며칠간 바람이나 쐬고 오기로 하였다.

 잘 뚫린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 내달리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아내 품에 안긴 손녀의 옹알거림과 새색시 숨결처럼 보드라운 봄바람이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어울러 져 한편의 교향악곡을 듣는 듯하였다.

 고속도로를 나오자 ‘새만금방조제’앞에서 출발하는 ‘고군산군도’행 유람선을 탔다. 옹기종기 모인 섬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내달리는 뱃머리를 끼룩 끼룩거리며 따라오는 갈매기 떼가 신기한 듯 손녀도 배창에 매달려 까치발을 딛고 내다보는 모습이 마냥 귀엽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이 시내에서 가까운 해안을 따라 조성된 ‘진포해양공원’을 산책하였다. 6.25전쟁 때 사용하던 군함과 비행기, 탱크, 각종 포들이 진열되어 안보교육장으로 잘 활용되고 있었다. 산책하다가 어느 노인이 갑자기 장인어른을 보더니 반갑다고 악수를 청하였다. 장인어른이 쓰고 있는 모자에 태극문양의 국가유공자마크를 보고 동지를 만났다고 금세 6.25전쟁 당시의 무용담이 시작되었다. 장인어른은 전쟁 나던 해 스무 살 나이에 참전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3년 동안 백마고지전투를 비롯하여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외출할 때면 반드시 국가유공자표식이 달린 모자와 가슴에는 참전용사 배지를 꼭 달고 다닌다. 나라위해 몸 바쳐 왔으며 전쟁에 참전했다는 자긍심을 내보이고 싶은 것이다. 장인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는 것과 다름없다. 일제시대에는 아홉 살 어린나이에 부모를 따라 만주봉천에서 살다가 해방을 맞아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6.25전쟁을 맞은 것이다.

 이른 점심을 먹고 다음목적지인 통영까지 가는 길에 벚꽃으로 유명하다는 쌍계사로 향하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끝물의 벚꽃들은 꽃비 되어 눈물처럼 날리고 있었다. 쌍계사 매표소에서 일주문까지의 꽤나 먼 길을 유모차를 끌고 올라가니 내려오던 일행들이 손녀를 보더니 “너는 좋은 아빠를 만나 편히도 올라가고 있구나!” 하기에 그냥 눈만 껌뻑이며 오르막길을 힘든 줄도 모르고 올라왔다.

 쌍계사를 내려와 화개장터입구에서 ‘평사리’를 거쳐 남해고속도로 하동IC까지 19번 도로는 내내 섬진강을 옆구리에 차고 내려가는 데 고운 봄 햇살이 강물에 반사되어 마냥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봄기운에 취해 여유를 부리다 저녁 늦게 통영 최남단의 낙조로 유명한 ‘달아공원’ 인근의 리조트에 도착하였다.

 아침에 눈을 뜨니 거실 창 한 가득 한려수도의 장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리조트 주위에는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방목하는 염소와 토끼들은 한가롭게 뛰놀고 관상용으로 키우는 금계와 꿩들이 손녀를 반갑게 맞아주고 있다. 천천히 섬 주위를 일주하다가 미륵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타고 한려수도와 통영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는데 한 폭의 동양화를 감상하는 듯하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통영굴밥과 충무김밥이 맛있다지만 리조트근처에 선장이 직접 운영하는 횟집에서 갓 잡아 올린 참돔을 한 접시 굵게 썰어놓고 장인어른과 함께 기울이는 소주 맛에 비길 수는 없었다. 혹독한 전쟁과 노동일로 살아오면서 지금은 지팡이 없이는 거동이 불편한 몸이지만 술과 식사만큼은 젊은 사람 못지않다. 장인도 부모라는데 정말이지 여생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다.

 아침에 떠나려니 보슬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산새 한 마리가 날아와 거실 밖 후박나무에 앉아 안을 기웃거리며 들여 다 보고 있다. 반갑다고 손을 흔들어 대었더니 손녀도 금세 눈치를 채고 ‘빠이빠이’를 하며 작은 손을 흔들어 대었다. 아내는 손녀의 손을 잡고 나는 지팡이를 잡은 장인을 부축하며 리조트를 나섰다.

 장인어른의 굽은 등 뒤로 가는 보슬비가 사뿐히 내리고 있었다.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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