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1 2013년 이른봄 철거를 앞둔 최 면장네집, 먹 펜 심전도 롤지위에>


백령성당 언덕을 내려가면서 본격적인 진촌리 마을이 펼쳐진다.

백령섬의 면사무소가 진촌리에 소재해 있으니 섬의 중심지다.

어릴 적 길 감각으로 거리감이 있는 줄 알았는데, 길따라 내려가 보니 섬 마을 길은 거기가 거기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 새삼 웃음도 나고 재미도 있다.

그 면사무소 옆 담 사이길을 두고 어릴 적 내가 할머니와 살던 추억의 집이 있었다.
 


<그림2 백령 진촌리886 기억 속의 최 면장네집 .종이위에 수채 54X39 cm>
 

백령 사람들은 그 집을 ‘최 면장네 집’이라고들 불렀다.

내가 백령도 그림을 그리고 백령도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는 바로 이분, 최 면장! 작고하신 나의 아버님. 그분의 삶이 거기에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25세 되던 해방 이듬해 부터 6.25동란을 거쳐 1953년까지 약 7여년 동안 면장을 하셨다. 그 민족 수난기에 면장직을 하시면서 원주민과 피난민들의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 그리고 과로로 병고 끝에 50세에 운명하셨다. 내가 태어난 1954년 이후 인천에 나와 살면서도 최 면장이라는 말은 늘 우리 가족들 주변에 붙어다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최 면장 집은 3년 전 2013년 6월 헐려버리고 말았다.

철거하던 날,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오셔서 “이집이 곤몰 동네 제일 큰집이었어...” 하시며 생전의 할머니와 부모님 이야기들을 들려주셨다. 가슴 속에 남아 맴돌던 나의 뿌리, 그 고향의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어릴 적 깜깜한 여름 밤, 동네 아이들과 넓직한 앞마당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짚멍석을 펴고 누웠지. 올려다 본 밤하늘에 무수히 박혀있던 별들이 쏟아져 내렸고...’
 

<그림3 할머니 집 마당을 덮었던 큰 느티나무, 보이는 집은 작은 고모집이었다. 먹, 펜, 심전도지위에>


나는 집을 허문다는 소식에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상실감에 초조해하며, 소중한 추억의 흔적마저 사라질 것 같아 백령 섬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마지막 모습을 그려야 했다. 이른 봄바람에 손은 시렵고, 그리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고 까닭모를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그림4 철거당일날 현장 스케치. 종이위에 먹, 펜, 콘테>
<그림5 의연하게 버티고 있는 지붕 뜯겨나간 할머니집. 종이위에 먹,펜>


나는 어린 시절 이후 오랫동안 아무도 살지 않아 빈집이었던 할머니의 집 안으로 처음 들어가 보았다. 진흙 벽과 나무 골조들이 얼기설기 밖으로 뚫려져 있는 을씨년스러움에 혼자인 나는 무섭기까지 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무슨 집이겠는가?

 

할머니가 가마솥에 불을 때시던 아궁이는 망가져 있었다. 그 남아있는 흔적도 소중한 데, 그것이 또 안스러웠다.

잔치집에 가시며 어린 나에게 “아가다야~~ 집 잘 봐라~~”하시던 할머니 음성이 들린다.

그때 나는 할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 꼼짝 않고 그 퇴방계단에 앉아 있었는데... 지금, 나는 그 집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림6 할머니의 아궁이는 다 허물어지고.?29X21cm. 종이위에 수채>


할머니네 집 부엌은 집 정 중앙에 있어 노란색 부엌문은 대문처럼 사용되었다. 동트는

새벽이면 한 무리의 동네참새 떼들이 우리집 느티나무로 다 몰려온다.


시끄러운 소리에 일어나신 할머니는 삐꺽삐꺽 부엌문을 여시고 느티나무를 향해 “워이~~워이~~” 목청 큰 소리를 내시면서 양철 쓰레받기를 탕!탕! 두드리신다. 째째째짹~~~후드드~후드득~~ 참새들이 황망히 날아가는 모습도 선하게 떠오른다. 어린 난 그게 너무 재미있었지. 그러나, 아~ 이제는 다 없다! 너른 마당에 덩그마니 나무들만 남아 주인 잃은 집, 그 빈터를 지키고 있다.



<그림7 할머니집 부엌문에 서서,54X39cm 종이위에 수채>


<그림8 허문집터에 남아있는 개죽나무, 은행나무, 오동나무, 종이위에 수채 >


<그림9 집 허문 뒤 슬픈 느티나무, 54X39CM 종이위에 수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