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1 백령성당>
 

진촌마을로 가는 비탈길을 오르면 언덕 위에 평평하고 아주 넓직한 땅 위에

백령성당과 성모유치원, 그리고 백령병원 등이 등장한다.

이 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북녘땅과 바다에 떠있는 월내도가 보인다.

백령도 이야기 두 번째로 백령성당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이유는 필자와 많은 인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2 백령성당 앞마당에서>


18세기말 조선에 전래된 천주교는 조선 조정으로부터 신유박해와 기해박해를 받았듯이 신앙생활의 어려움은 참담한 그 자체였다.

조선인 최초의 사제가 된 김대건 신부는 중국에서 선교사를 조선으로 입국시키기 위해 백령도를 서해 해로의 경유지로서 개척하는 와중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1845년부터 1880년까지 프랑스 선교사 21명이 중국으로부터 백령도를 경유하여 서해해로로 조선에 입국한 것은 백령도가 천주교 역사에 지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게해준다.

 

그러면 백령도 안에서의 실질적인 천주교 전파는 언제 부터였을까?

그 자료가 ‘백령도성당 50년 여정’ 책자 64쪽에 서술되어있다.

“백령도의 실제적인 천주교 전교는 1945년 4월 15일 황해도 장연 출신의 경애유치원 교사였던 김양겸(필자의 모친, 95세 생존)이 백령도의 최경림(필자의 부친,작고)과 장연 본당에서 혼배성사를 하고 백령도로 입도하면서 실제적인 전교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니까 나의 어머님이 백령도 남자, 우리 아버지를 만나 백령도로 시집와서 천주교를 전교하고 당시 면장집이던 사랑채에서 공소예절을 드린 것이 최초의 종교적 모임(1947년)이었던 것이다.


<그림3 벚꽃이 만개한 백령천주교회>
 

그 후 지금 현존해 있는 백령천주교회는 1959년 메리놀회 부영발 외국신부님이 오셔서 만드셨는데 부속 건물과 시설을 늘려 사제관, 수녀원, 복자보육원, 양로원, 유치원, 나아가 복자 김안드레아 병원(백령병원의 초창기 명칭)등을 형성하였다.

부 신부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백령천주교회는 1950년 한국동란 후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의 빈곤 해결을 위한 구호사업과 낙도민들 위한 의료사업이 본격화됐다. 당시 백령도 주민 뿐 아니라 인근 섬 주민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베풀었는데, 그야말로 천주교 성지였던 셈이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나이들어 그 곳을 찾아가보니 60년 가까이 되는 성전은 초라해 보인다. 그나마 성모 유치원은 새로이 단장하여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한 미래가 밝게 느껴졌다.



<그림4 백령성당 마당의 성모동산>
<성모유치원 수리 전의 모습>

<유치원 앞 담 모퉁이에 새싹이 나오네>
 

성당 옆길을 돌아 안쪽으로 쑥 들어가면 결핵 요양원과 복자 안드레아 병원이었던 곳에 옛 백령병원이 아무 쓸모없는 채로 폐 공간이 되어 쓸쓸히 남아있다.

백령 주민들의 숙원대로 인천시가 더 큰 병실과 좋은 진료시설을 갖춘 백령병원을 새로 건립하여 2014년 7월에 이전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림7 폐공간이 되어버린 백령병원과 응급실>
 

썰렁하고 여기저기 버려진 물건들이 널려있는 병실 안으로 들어가 본다.

2013년 7월 백령도에 들어 왔다가 나의 가족이 쓰러져 저 응급실 베드위에 누웠었지.

우리는 엠브란스를 타고 CT 촬영을 위해 당직 의사선생님과 군부대 병원으로 깜깜한 밤길을 달렸다. 그리고 긴박한 뇌수술을 위해 군 병원에서 그 먼 뱃길, 칠흙같은 어둔 밤바다를 해양경찰의 배로 6시간을 후송, 새벽에 인천부두에 닿아 길병원에서 수술을 하였지...

아 아! 백령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