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불멸의 건축을 이끈 건축가, 이희태 (17화)



17화> 불멸의 건축을 이끈 건축가, 이희태



아침부터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신문의 위력이라고 해야겠지.” 송림동성당의 건축가가 이희태 선생이었고, 그 분이 다름 아닌 절두산순교복자성당과 기념관의 설계자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공론화된 탓이다. “이것 참...” 금양은 속이 쓰리다는 것이 이런 기분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었다. 인천이 개항기 식민 근대건축의 박물관 도시라는 정보에 대해선 어지간한 시민들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인천에 한국현대건축 1세대 유명 건축가의 작품이 잔존해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에의 충격이 컸던 것이다. 그것은 인천 건축연구의 현주소가 편협된 시간대에 머물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 수 없었다.


이희태(1925년생). 그는 16세의 나이에 경성공업직업학교 건축과에 진학하면서 건축에 흥미를 갖는다. 이 시기는 일제의 식민지 활동이 강화되며 ‘대동아공영’을 주장하던 제국주의 시절로, 우리나라에는 식민지를 다스리는 데에 기반이 된 공공건축(관공서)과 군수, 산업시설 중심으로 건축되던 시기였다. 이후 그가 경성공업직업학교를 졸업하던 1942년은 일본에 의한 태평양 전쟁이 확전되는 시기로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징용과 징병의 대상으로 전쟁터에 끌려가고 있었다. 당시 다수의 건축인들은 징용 면제의 방편으로 전쟁을 피해 조선비행기 공장에 근무를 자원한다. 그곳은 당대 일본 매파자본가로 알려져 있는 박흥식이 경영하던 군수공장으로 이천승, 김태식, 김중업, 김명집, 이명희 등의 선배 건축인들이 근무하고 있었으며 이희태는 그곳에서 만난 선배들과 함께 훗날 한국건축작가협회(1957년 1월, 현 한국건축가협회의 전신)를 결성하게 되는 것이다.(김욱성, 명지대 석논, 1990)


한국의 근대건축은 식민지 기간과 전쟁을 통해 많은 부분 왜곡되었다. 건물의 존재성 자체가 논란이 되었고, 시기구분 또한 여전히 모호하며, 자주적으로 성숙된 역사적 상황에서 근대를 수용하거나 창출하지 못했다는 자각이 압도적이었다. 그 후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근대성과 전통성을 주제로 한 사회적 논란-1966년 국립중앙박물관(현 국립민속박물관) 현상설계의 시대착오적인 설계조건, 즉 한국의 고전건축 중 우수작을 모사할 것이라는 지침에 설계참여를 거부한 일단의 건축가들의 행동과 1967년 김수근의 부여박물관 왜색시비-에 휩싸이게 되는 건축계는 비로소 우리 것에 눈을 돌리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양승숙, 명지대 석논, 1994) 이 지점에서 이희태의 건축세계가 뒤늦게 주목되는데 그가 보여준 한국건축의 근대성에 대한 이해가 자생적이었다는 점과 한국전통건축의 고전적 어휘를 현대건축의 언어로 번안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건축사가 김봉렬은 60년대 이희태가 전념한 고전건축어휘의 현대화 추구가 민족주의적인 복고주의와는 구별되는 시도라고 평가한다.


이희태 건축의 정점은 종교건축과 문화시설건축으로 크게 대별된다. 서울 남산의 국립극장(1969)과 경주박물관(1972), 공주박물관(1974) 등이 그가 설계한 문화시설건축의 수작이라면 절두산순교복자성당과 혜화동 성당은 종교건축의 수작으로 손꼽히는데 이들 작품에서 그는 엄격한 비례감과 기단, 몸체, 지붕의 삼분된 입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건축수법은 두 개의 건축유형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이희태 건축의 특징을 이룬다.


이희태는 특히 경복궁 경내에 위치한 경회루의 하부를 받치고 있는 기둥의 열주를 차용한 건축어휘를 즐겨 사용하였는데 전통건축의 아이콘을 그이처럼 적극적으로 현대화시킨 사례는 드물 정도다.


그러나 당시 이희태 건축의 특질에 대한 평가가 우호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던 듯싶다. 60, 70년대 한국건축평단을 주도했던 청년 건축가 KW는 이희태가 설계한 국립극장의 비평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국립극장의 건축적 해결과 그 가치에 대해 흥미가 없다. 단지 거기서 시도된 한국의 전통적 디테일의 모더나이즈라는 한 작가의 방법론이 소위 전통논쟁을 위한 한 제안으로 받아들여져 쉽게 답습될 위험을 말해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나쁜 의미에서의 한국적 디테일의 디자인이다. 차라리 그것은 영빈관의 우직성보다도 낮은 차원의 유희이며, 고전의 오해이며, 고전적 정신에의 모독이다.”(김원, 우리 시대의 거울, 도서출판 광장, 1988)


적어도 이희태의 절두산순교복자성당과 기념관이 설계되고 국립극장이 설계되던 그 시절 이 땅의 건축은 입면을 건축의 목적으로 잘못 판단하여 건축을 시각적 상징과 기호로 취급하는 관주도의 건축이 횡행하던 시대였다. 김원의 지적은 그 시대 이희태의 건축이 건축의 중요성을 오브제로 국한시키는 한국적 디테일의 네거티브 디자인을 획책했음을 경고한다는 발의로 읽힌다.


그러나 다시 20년이 흐른 지금 이희태의 건축, 특히 절두산순교복자성당과 기념관 등에서 받는 감동은 건축이 일종의 조형예술의 한 가닥으로서도 건축을 통한 참다운 삶이 만들어질 수 있다, 라고 하는 가능성의 발견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금양은 써내려가던 건축일기의 표지를 닫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건축이란 무엇인가? 불멸의 건축이란 또한 무엇인가?
<계속>



등장인물

KW(실명:김원)=1943년 서울 출생 건축가.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나와 김수근건축연구소에서 수업하고 네덜란드 바우센트룸 국제대학원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건축연구소 ‘광장’ 및 도서출판 ‘광장’의 대표로 있다. 한국건축가협회 명예이사 등 건축계 요직을 역임했고 특히 환경문제에 깊은 관심이 있어 동강을 사랑하는 문화예술인 모임, 동강내셔널트러스트, 병산서원을 지키는 모임의 공동대표와 NGO 푸른나라 대표, 국회 환경포럼 자문위원을 맡았다. 한강성당, 국립국악당, 통일연수원, 서울종합촬영소, 광주가톨릭대학교 등 주요 설계 작품과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우리 시대 건축이야기’ ‘새 세기 환경이야기’ 등 다수의 저서를 냈다.


인천신문 2008.1.3

댓글 1